
29. 의심 없는 믿음은 가능한가
- 신앙은 확신인가 성장인가
많은 신앙인은 의심을 죄처럼 여긴다.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어야 하며, 질문은 신앙이 약한 사람의 특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오히려 하나님은 질문하는 사람들을 오래 기다리셨다.
아브라함도 웃었고, 모세도 거절했으며, 엘리야도 낙심했고, 예레미야도 탄식했다. 시편은 수없이 "어찌하여"라는 질문으로 가득하다.
믿음은 질문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질문 속에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관계다.
철학의 역사는 질문의 역사다.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했다.
칸트 역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끝까지 질문했다.
철학은 의심을 파괴가 아니라 탐구의 출발점으로 이해했다.
신앙 역시 진리를 향한 여정이라면 질문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토마스는 쉽게 믿지 못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다."
많은 사람들은 토마스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기억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토마스를 책망하기보다 직접 찾아오셨다.
상처를 보여 주셨고 손을 내밀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놀라운 점은 예수님이 토마스의 질문 자체를 죄악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질문을 믿음으로 이끄셨다.
토마스는 결국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 가운데 하나를 남긴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의심은 끝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의 문이 되었다.
의심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진리를 찾기 위한 의심이다.
두 번째는 아무것도 믿지 않으려는 냉소다.
전자는 믿음을 깊게 만든다.
후자는 모든 관계를 끊는다.
건강한 의심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한다.
냉소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다.
철학 역시 건강한 회의를 존중했지만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는 경계했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한다.
SNS와 유튜브를 통해 수많은 비판과 반론을 듣는다.
그러나 정작 교회 안에서는 질문할 공간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냥 믿어."
"의심하면 안 돼."
이런 말은 청년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오늘의 청년은 설명을 원하고, 대화를 원하며, 함께 고민할 공동체를 찾는다.
탈종교 현상은 단순한 불신앙이 아니라 질문을 품을 안전한 공간을 찾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철학은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다.
신앙 역시 질문을 금지하지 않는다.
둘의 차이는 목적이다.
철학은 진리를 찾기 위해 질문한다.
신앙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위해 질문한다.
의심은 믿음의 반대가 아니다.
무관심이 믿음의 반대다.
질문하는 사람은 아직 진리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다.
토마스의 의심은 결국 가장 깊은 고백으로 이어졌다.
오늘 우리의 질문도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그 질문은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단단하게 세우는 과정이 될 수 있다.
신앙은 한 번 얻는 확신이 아니라 평생 자라가는 관계다.
의심은 믿음의 실패가 아니라 성숙을 향한 통로가 될 수 있다.
철학이 질문을 통해 진리를 찾듯, 신앙은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간다.
의심 없는 믿음보다 중요한 것은,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내 놓지 않는 믿음이다.









